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4세 (문단 편집) === 어린 시절 === 1553년 현재의 [[프랑스]] 서남부 피레네-아틀랑티크 지방인 [[나바라 왕국|나바르 왕국]]의 베아른 지역 포 성에서 '나바르의 앙리' 또는 '나바라의 헨리케'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. 아버지인 방돔 공작 [[안토니오(나바라 왕국)|앙투안]](Antoine de Bourbon, duc de Vendôme)은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의 8대손이었고,[* 엄밀히 말하면 직계는 아니다. 부르봉 공작의 직계는 피에르 2세의 딸인 쉬잔느 드 부르봉이 자식을 얻지 못한채 죽으면서 끊겼고, 쉬잔느와 결혼했던 몽팡시에 백작 샤를 드 부르봉이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되었으나 [[이탈리아 전쟁]]에서 발루아-앙굴렘 왕조의 초대 왕 [[프랑수아 1세]]를 배반하면서 부르봉 공작위가 박탈되었다. 이후 샤를 드 부르봉이 [[사코 디 로마]] 와중에 죽으면서 부르봉 가문은 부르봉 공작 1세의 방계인 방돔 공작 가문이 이었다. 초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는 [[카페 왕조]]의 제9대 왕이자 중세 최고의 명군인 '성왕' [[루이 9세]]의 막내 아들 클레르몽 백작 로베르와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스(부르봉 영지의 상속녀) 사이의 장남이었다.] 어머니인 잔 달브레(Jeanne d'Albret)는 [[나바라 왕국|나바르]]의 여왕으로 [[프랑수아 1세]]의 누나 마르그리트의 딸이었다.[* 나바라 넘버링으로는 '[[호아나 3세]]'로 저 멀리로는 카페 왕조의 제12대 왕 [[루이 10세]]의 먼 후손이다. 따라서 앙리 4세는 부모 양쪽으로부터 성왕 루이 9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.] 앙리는 앙투안과 잔 사이에서 [[차남]]으로 태어났지만,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은 형 앙리 대신 후계자가 될 수 있었으며, 여왕인 모친이 사망하자 나바르의 왕위를 이어받아 '헨리케 3세'로 즉위했다. [[가톨릭]]의 [[세례성사]]를 받았으나[* 앙리 4세가 처음부터 [[개신교]]였다는 건 잘못 알려진 사실이며, '''태어났을 때 세례는 [[가톨릭]] [[세례성사]]를 받았다'''. 아버지 [[안토니오(나바라 왕국)|방돔 공작 앙투안]]이 [[가톨릭]] 신자였기 때문. 반면에 어머니 잔 달브레는 아주 신실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부부간에 [[종교]]가 달라서 말 그대로 박터지게 싸웠을 것 같지만, 사실 앙리의 아버지 앙투안은 정치적 야심도 없었고 종교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었기에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. 거기에 앙투안은 상당한 [[공처가]]였던지라 아내인 잔의 종교도 존중했다.] 나바르 여왕이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는 신실한 [[위그노]][* 잔 달브레의 어머니 마르그리트 당굴렘([[프랑수아 1세]]의 누나)이 개신교도였다.]답게 강경한 인물이었기에 위그노로 자랐다.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베아른에서 지냈다. 베아른 사람들은 대개 개방적이고 영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, 이는 앙리 드 나바르의 성품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. 앙리 드 나바르는 신앙에 기반한 이상주의자인 강경한 어머니와는 다르게 '''온건한 성품을 바탕으로 개방성을 발휘하여 훗날 행보에서도 알 수 있듯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'''. 1561~1567년까지 프랑스 발루아-앙굴렘 궁정에서 6촌인 [[앙리 2세]]의 자녀들과 함께 지냈으나, 그 사이인 1562년 '''바시에서의 신교도 학살'''로 '''제1차 [[위그노 전쟁]]'''(1562~1563)이 일어나면서 그의 일가 전체가 프랑스 칼뱅파, 즉 [[위그노]]와 가톨릭으로 나누어졌다. 앙리의 아버지인 [[안토니오(나바라 왕국)|방돔 공작 앙투안]]은 위그노와 동맹을 맺다가 곧 편을 바꿔 가톨릭 편에 서서 싸웠고, 노르망디의 '''루앙 전투'''에서 중상을 입어 결국 상처가 악화된 상태에서 사망했다. 1568년 앙리 드 나바르는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어머니 잔 달브레, 즉 [[호아나 3세]]의 곁으로 돌아와 프로테스탄트의 엄격한 원칙에 따른 교육을 받으면서 군사 교육도 받았다. 1569년 가을에 나바르 남부의 반항적인 가톨릭 무리를 진압하기 위한 토벌대의 이름뿐인 지휘자가 되어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. 그러다가 '''제3차 위그노 전쟁'''(1568~1570)이 발발하면서 그동안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잔 달브레는 적극적으로 위그노를 지지했고, 아들인 앙리 드 나바르를 같은 위그노이자 시동생인 콩데 공작 루이 드 부르봉에게 맡겼으나 1569년 3월 13일 자르냐크 근처에서 벌어진 [[앙리 3세|앙주 공작 앙리]]의 기습 공격으로 패배하고, 숙부인 콩데 공작 루이가 전사하게 되자('''자르냐크 전투''') 잔 달브레는 서둘러 전쟁터로 달려와 아들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. 허나 사령관의 모든 권한은 앙리 드 나바르의 군사교육을 맡은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에게 있었으며, 이후 사촌인 소 콩데 공작 앙리[* 자르냐크 전투에서 전사한 숙부 콩데 공작 루이의 아들이었다.] 드 부르봉과 함께 10월 3일의 '''몽콩투르 전투'''에 참전했다. 1570년 6월 26일 16세의 나이로 아르네르뒤크 근처에서 처음으로 출전하여 위그노 기병대를 지휘했고, 이후 푸아투에서 [[부르고뉴]] 심장부에 이르는 황폐해진 지역을 오랫동안 원정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